토니 킴(저자) 윤덕영(역자) <키르케고르: 신앙의 합리성>-신앙과 이성의 문제-(홍성사, 2018)
키르케고르: 신앙의 합리성
-《철학의 부스러기》에 나타난 신앙과 이성에 대한 연구
Reasonableness of Faith: A Study of Kierkegaard's Philosophical Fragments
토니 킴
윤덕영 옮김
역자해설
1.
쇠렌 키르케고르(1813.5.5.~1855.11.11.)가 누구인가? 기독교의 변증가, 실존주의 사상가, 순교자, 문학가, 심리학자, 시인, 반어가(ironist)이자 유머가 이다. 철학의 주제를 로고스에서 파토스로 바꾸었고 이성과 집단중심의 객관성의 철학에서 신앙과 개인의 인격을 강조하는 주체성의 철학으로 바꾼 사상가이다. 무엇보다도 진리의 교리는 있으나 진리의 정열과 경외감이 사라진 당대 기독교 세계에 기독교의 본질을 일깨워 주려 했던 진리를 사랑한 투사요 순교자이다. 피터 크리프트(Peter Kreeft)교수는 《소크라테스와 키르케고르의 만남(Socrates Meets Kierkegaard)》 서문에서 2000년 철학사에서 지성과 상상력, 진리와 아름다움, 철학과 시, 객관과 주체를 결합한 플라톤을 필적할 만한 사상가는 키르케고르 외에는 없다고 하였다. 키르케고르는 42세라는 짧은 생애를 살면서 양적으로 방대하며 질적으로 풍성하고 깊이 있는 저술을 남긴 탁월한 기독교 사상가이다.
키르케고르는 20권의 저술과 25권의 일기를 포함하여 45권의 저서를 남겼다. 그의 저술은 세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철학적인 저술, 강화집(기독교 설교집) 그리고 일기이다. 폴 틸리히는 《기독교 사상사》 에서 키르케고르 저술들 가운데 필독서 두 권을 추천하였는데 《죽음에 이르는 병》(1849년)과 《불안의 개념》(1844년)이다. 전자는 절망의 문제를 다루었고 후자는 불안의 문제를 다룬 작품이다. 다분히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한 심리학적인 요소가 강한 작품들이다.
그런데 키르케고르의 철학적 작업을 이해하는데 중심이 되는 책은 《철학의 부스러기》(1844년, 이하 《부스러기》)와 《철학의 부스러기의 결론적 비학문적 후서》(1846년, 이하 《후서》)라고 황필호 박사는 말한다. 이 두 책은 신앙과 이성의 문제, 영원과 역사의 문제, 신과 인간의 문제, 진리의 주체성, 절대적 역설과 신앙의 비약의 문제를 다룬 가장 철학적이고 논리적인 키르케고르 저서이다. 이 두 책을 읽지 않고는 키르케고르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역설적이게도 본서인 《부스러기》는 덴마크 원서로 83쪽인데 반하여 부록에 해당되는 《후서》는 600쪽이 넘는다. 이렇게 저술한 것은 이성의 절대성과 진리의 객관성을 주장하는 헤겔 사상을 비꼬려는 의도가 담겨 있는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칸트, 흄, 헤겔 등의 철학자가 이성을 기반으로 하여 진리를 체계화시킨 것에 저항하여 그러한 객관적 진리는 삶의 현실과 인간의 실존을 제대로 담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키르케고르는 진리는 주체적이며 인격적이며 신앙적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칸트의 도덕철학과 헤겔의 절대이성(Absolute Reason)에 반대하여 키르케고르는 진리의 내면성과 주체성 그리고 절대역설(Absolute Paradox)을 주장한다. 절대역설은 신앙의 대상인 신-인(神-人, the God-Man), 시간 가운데 계신 하나님(the God in time)을 가리킨다. 절대역설은 이성에게 부조리하게 보인다. 이성으로는 절대역설을 파악할 수 없으며 오직 주체적인 신앙의 비약을 통하여 신의 역사적 계시인 성육신의 진리를 전유(appropriate)할 수 있다.
키르케고르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풍미했던 헤겔철학과 당대의 기독교를 알아야만 한다. 키르케고르의 실존 사상은 헤겔의 절대정신에 반박하여 일어난 사상이기 때문이다. 키르케고르는 두 가지 점에서 헤겔 사상에 반대한다. 첫째, 헤겔철학은 진리를 철학적으로 체계화시킴으로써 인간은 마치 거대한 기계의 톱니바퀴에 불과하게 되었다. 헤겔은 개인의 자유나 결단이나 참여와는 무관하게 역사는 필연적으로 완성을 향해 나가고 있다고 보았다. 키르케고르는 이러한 집단 정신에 반대하여 신 앞에 홀로 선 단독자 사상을 주장한다. 둘째, 헤겔철학은 이성을 기반으로 한 객관적 진리를 주장한다. 반면 키르케고르는 진리의 주체성을 강조한다.
2.
그렇다면 《부스러기》는 어떤 책인가? 이 책은 소크라테스와 예수의 진리관을 비교하고 있다. "진리를 배울 수 있는가?" "참된 행복을 얻는 길은 무엇인가?" 라고 이 책은 질문하고 있다. 키르케고르가 소크라테스를 좋아하는 이유는 적어도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무지를 안다는 면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키르케고르는 예수 그리스도 다음으로 소크라테스를 최고의 스승으로 삼았으나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인 철학자들의 철학 체계에 대하여는 심한 비판을 가했다. 대표적으로 당대의 최고의 철학자 헤겔의 사변철학을 비판한 것이다. 헤겔은 《역사철학강의》와 《정신 현상학》에서 절대이성 또는 절대정신을 말하면서 이성을 절대의 자리에 놓았다. 이러한 헤겔철학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 신학도 사변적이 되었다. 교리를 곧 기독교로 착각한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말한다. "교리는 기독교가 아니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삶은 철학보다 더 크다.” 키르케고르가 보았을 때 인간의 실존이 철학이나 신학체계보다 더 크다. 철학의 진리보다도 철학자의 진실이 더 중요하다. 그는 기독교인이 믿는 교리보다도 기독교인에게 체화된 삶의 진리를 보여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헤겔의 사변철학은 역사를 절대정신이 실현되어가는 과정으로 보았다. 헤겔철학은 집단이나 역사의 필연성을 강조하는데 여기에는 개인의 결단이나 참여가 결여되었다. 헤겔의 사변철학과 마찬가지로 당대의 기독교는 교회와 삶이 분리되어 있었다. 교리체계는 완벽하나 삶의 변화는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는 국가교회였으므로 사람들이 공무원이 되려고 세례를 받고 교인이 된 것이지 진리에 대한 사랑이나 열정이 있어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키르케고르에게는 철학보다 철학자가 더 중요하다. '무엇'을 아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키르케고르는 철학의 중심을 로고스(이성 중심)에서 파토스(정열과 의지)로 이동시킨 사상가이다. 키르케고르로 말미암아 철학의 주제가 로고스에서 파토스로 넘어가게 된 전환점이 되었다.
《부스러기》는 철학과 종교, 이성과 신앙, 역사와 영원의 문제를 다룬다. "진리를 배울 수 있는가? 진리를 배울 수 있다면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은 철학(이성)인가 신앙인가?" 하는 물음을 다루고 있다. 이성 중심의 입장에서 철학과 신학을 전개한 칸트, 헤겔, 슐라이허마허 등의 사상에서는 초월의 영역이 닫혀 있거나 막연한 가설로 설정되어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들을 자연주의자라고 부른다. 반면에 《부스러기》에서 제시하는 것은 초월, 즉 영원하고 절대적인 신을 알 수 있는 길은 오직 신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답하고 있다. 신앙과 이성은 양립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키르케고르를 초자연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죄로 인하여 이성이 온전하지 않기 때문에 초월을 알 수가 없다. 다만 초월을 알 수 있는 조건은 회개와 믿음을 통하여 시간 속에 오신 신(God-in-time)이라는 성육신의 역사적 계시를 믿는 것이다. 오직 신만이 진리를 아는 조건과 진리를 인간에게 줄 수 있다. 헤겔이 인간의 절대이성의 능력으로 진리를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반면에 키르케고르는 인간은 비진리(un-truth)이며 오직 신의 은총으로 주어진 구원의 교사요 구원자인 성육신이라는 절대역설을 믿는 신앙의 비약을 통하여 영원한 행복인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3.
《부스러기》라는 제목이 암시하고 있듯이 인간은 진리의 전부를 소유할 수 없으며 진리의 부스러기 또는 조각들을 소유할 뿐이다. 부스러기는 성경의 몇 가지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한 이방 여인이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겸손히 말했듯이 이성의 교만함으로는 진리를 체득할 수 없고 단지 회개하는 겸손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신의 선물이다. 누가복음 16장에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가 나온다. 부자는 수시로 잔치를 벌였지만 거지 나사로는 부잣집에서 나오는 부스러기를 먹고 살다가 죽는다. 죽은 후에 부자는 지옥에 가고 거지 나사로는 천국에 갔다.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부자는 헤겔을 상징하며 이성의 교만함을 상징한다. 머리로만 기독교의 교리를 아는 당대의 기독교 세계를 빗대고 있는 것이다. 반면 거지 나사로는 기독교의 진리를 구체적인 삶속에 적용하여 신을 의지하는 삶을 살아가는 단독자(The single individual)를 가리킨다. 헤겔사상과 기독교의 사변적 교리를 부자로, 삶의 현장 속에서 구체적으로 진리를 실천하는 단독자를 천국에 가게 된 거지 나사로로 암시하고 있다. 교리나 지식으로 가득한 자는 결코 진리에 목말라하지 않는다. 종교생활에 익숙한 자도 결코 마음이 가난하지 않다. 그래서 키르케고르는 저술을 한 목적이 사람들에게 지식을 넣는 것이 아니라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사변적 지식이나 교리를 빼내는 것이라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부스러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병이어 기적에서 장정만 오천 명이 먹고 남은 빵조각, 즉 부스러기를 상징하기도 한다. 부스러기는 헤겔의 방대한 사변철학을 비꼬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진리는 체계가 아니라 한 조각으로 존재할 뿐이라는 것이다. 객관적 지식의 양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회개와 결단과 책임과 의무를 적극적으로 현실화시키는 주체적 진리가 사람을 변화시킨다고 주장한다. 《부스러기》를 저술한 목적은 지식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삶을 변화시킬 수 없는 과잉 지식을 빼내기 위한 것이다.
입 안에 음식이 가득 찼을 때 그는 더 이상 먹을 수가 없어서 종국에는 굶어 죽게 되는 판에 그에게 음식을 더 주어서 입을 더 꽉 차게 해야 하는가 아니면 입에서 일정량을 빼내어서 음식을 먹을 수 있게 해 주어야 하는가?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매우 지식이 많지만 그의 지식이 무의미하게 되거나 사실상 그에게 무의미하게 되었을 때 지각 있는 의사소통을 하려면 비록 그가 더 많이 아는 것이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고 할지라도 그를 더 많이 알도록 할 것이 아니라 대신에 그에게서 무엇인가를 빼내는 것(taking away)이 필요하다.(《후서(Concluding Unscientific Postscript to Philosophical Fragments)》, vol.1., p 275.)
키르케고르의 책은 결코 지식의 만족을 주지 않고 마음의 울림을 주고 변화를 촉구한다. 과잉된 지식이 영원한 행복을 줄 것이라 착각하지 말아야 하며 그 진리를 알고 신뢰함으로써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그 진리를 따라서 실천해야만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가 있다. 《부스러기》와 《불안의 개념》은 쌍둥이 작품이다. 《부스러기》는 요하네스 클리마쿠스(Johannes Climacus)라는 가명 저자의 이름으로 1844년 6월 13일 출판되었고 불과 나흘 뒤인 6월 17일 《불안의 개념》이 가명 저자 비길리우스 하우프니엔시스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이 둘을 쌍둥이 저술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하나는 신약의 세계를 다른 하나는 구약의 세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부스러기》는 신약성경에 기록된 성육신 사건에 나타난 인간의 구원의 문제를 다루며 《불안의 개념》은 구약의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타락한 것에 나타난 인간의 죄와 불안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두 쌍둥이 작품에서 키르케고르가 변증법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신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은 인간만이 비로소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회개하여 믿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신의 은총을 믿음으로 회개가 가능하게 된다는 순서이다.
4.
키르케고르의 두 가명 저자 요하네스 클리마쿠스와 안티 클리마쿠스 사이의 변증법을 염두에 두는 것이 키르케고르 사상을 이해하는데 유익하다. 요하네스 클리마쿠스는 《부스러기》와 《후서》의 가명 저자이며, 안티 클리마쿠스는 《죽음에 이르는 병》과 《그리스도교 훈련》(1850년)의 가명의 저자이다. 안티 클리마쿠스의 두 책은 매우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다. 요하네스 클리마쿠스라는 젊은 청년은 기독교 신앙의 진수를 제대로 알기는 하지만 아직 기독교인이 아니다. 한편 안티 클리마쿠스는 기독교의 진수인 신의 은총과 계시를 강조하는 계시적 종교성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부스러기》와 《후서》의 가명 저자 요하네스 클리마쿠스의 이름에 담긴 암호를 푸는 것이 중요하다. 15세기에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가 많은 기독교인들이 애독했던 경건 서적이었듯이 요하네스 클리마쿠스도 많은 사람이 애독하던 6-7세기 《천국의 사닥다리》의 유명한 저자였다. 요하네스는 성경의 저자 사도 요한이며 진리의 말씀을 상징하고 클리마쿠스는 계단 또는 사닥다리를 뜻하며 인간의 수행과 실천을 의미한다. 따라서 요하네스 클리마쿠스라는 이름은 성경과 철학의 조화, 사유와 실존의 조화, 생각과 행동의 조화, 관념과 실재의 조화를 추구하는 것을 상징한다. 성경에 나오는 야곱의 사닥다리(창28장 12절)와 하늘을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는 말씀(요1장 15절)이 나오는데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사닥다리는 철학(이성)인가 신앙인가? 하는 궁극적 물음에 대하여 클리마쿠스는 철학(이성)이 아니라 신앙의 비약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답한다. 절대역설인 성육신의 역사적 계시를 믿음으로써만 영원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르틴 루터는 행함을 강조하고 있는 야보고서에서 복음의 은혜적 측면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폄하하였다. 루터는 그만큼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예수를 강조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런데 키르케고르는 루터교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마르틴 루터가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했던 야고보서를 가장 사랑했다. 왜냐하면 오직 믿음의 진리가 당대 기독교 세계에서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하나의 교리에 불과하게 된 당대의 기독교 문화에 크게 실망하고 분노하여 키르케고르는 개인의 회개와 결단, 자유의지와 책임적인 선택 등을 통한 행함과 실존의 변화를 강조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당대 기독교는 국가교회로서 형식만 남았으며 진리에 대한 사랑과 놀라움, 신앙의 열정 등이 사라져 버리고 죽은 믿음만 남아 있다고 키르케고르는 기독교를 공격하였다.
키르케고르는 개인의 결단과 참여, 진리의 주체성과 신앙의 정열을 강조하였다. 키르케고르는 이성철학이 닫아 버린 초월의 세계를 다시 열어놓았으며 자유주의 신학 때문에 야기된 성경에 대한 불신과 구원자 예수에 대한 불신이 생겼을 때 객관적 진리의 허구를 드러내고 진리는 주체적이며 개인의 믿음은 영원하고 절대적임을 주장했다. 그리고 1·2차 세계 대전이 발생하여 진보주의 역사관이 한계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20세기와 21세기에 키르케고르가 주목을 받게 되었다.
5.
《키르케고르: 신앙의 합리성》을 번역하는 내내 풀리지 않은 의문이 들었다. 키르케고르는 "불합리한 고로 믿는다."는 터툴리안의 전통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던가? 저자는 어쩌자고 '신앙의 합리성'을 말하고 있는가? 억지 해석이 아닌가? 잘못된 해석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었다. 사실상 천주교는 믿음과 이성이라는 두 축을 붙들고 있는 반면 개신교는 언 듯 보기에 이성을 포기하고 오직 신앙만을 강조하는 사상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개신교는 반(反)지성주의인가? 철학을 반대하는가? 합리성을 무시하는가? 하는 질문을 받는다. 이것은 당연한 반응이다. 왜냐하면 오직 믿음을 강조하는 개신교는 이성을 포기한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책 제목을 《신앙의 합리성》이라고 내세운 것은 이러한 개신교의 취약점을 안타까워하는 개혁교회 목사이자 학자인 저자의 개신교에 대한 애정 때문에 설득력 없는 주장을 펼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토니 킴 박사와 수많은 이메일 교환과 통화를 했는데 그의 답변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독자들도 이 책을 읽어도 저자의 핵심 의도를 파악하지 못할까 조바심이 생겨 번역자가 어떻게 저자의 의도를 파악했는지 그 과정을 소개하고자 한다. 저자에게 물어볼 때마다 그는 키르케고르가 신앙의 비약을 강조했으며 이성으로는 진리를 알 수 없다고 주장하는 신앙론자가 맞다고 하였다. 여기까지는 모든 키르케고르 독자들이 동의한다. 그런데 저자의 설명은 그래도 키르케고르는 이성을 포기한 사상가가 아니며 이성은 신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하는 것이며 이성이 진리와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다. 키르케고르 사상이 오직 신앙과 진리에 따르는 삶을 강조하는 것은 납득이 가는데 저자가 이성을 옹호하거나 변호하는 주장은 내게는 낯설고 쉽게 납득이 되지가 않았다. 저자는 6장으로 이루어진 각 장을 마무리 할 때마다 '신앙에는 합리적 요소가 있다'고 계속 주장한다. 키르케고르 사상에서 신앙과 이성은 양립불가능하다. 그런데 신앙은 합리적이지는 않지만 합리성이 있다고 한다('reasonableness' of faith and not 'reasonable' faith). 여기서 진리를 전유한다(appropriate)는 말이 중요한데 진리를 전유한다는 것은 단순히 진리를 교리나 이론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내 삶과 실존에 소화되고 내 것이 된 진리를 말한다. 진리를 아는데 신앙과 이성의 역할은 무엇인가? "신앙은 절대역설인 성육신의 역사적 계시와 절대적· 영원적· 주체적 관계를 맺으며, 이성은 그 절대역설의 진리와 역사적· 상대적· 객관적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저자의 일관된 논지이다. 키르케고르 학자들은 흔히 진리의 주체성과 신앙을 강조하는 앞부분만을 강조하는데 저자는 이성도 진리와 역사적· 상대적· 객관적 관계를 갖는다는 것을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성은 신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완성시키는 신의 선물이다. 키르케고르/클리마쿠스가 “이성은 해임되었다(the reason is discharged)”라고 선언한 것은 신앙 안에서 교만한 이성이 폐위된 것이며 회개함으로 중생한 이성은 신앙을 완성시키는 충직한 신하로 제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는 주장이다. 이것이 키르케고어의 이성관이며 곧 개혁교회의 입장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이 책의 1장과 5장에서 키르케고르/클리마쿠스는 의지론자(volitionalist)인가 아닌가하는 물음에 대한 논쟁이 나온다. 이성을 강조하는 철학자를 주지주의자(intellectualist)라고 하고 신앙을 강조하는 철학자를 주의주의자(voluntarist) 또는 의지론자로 분류한다. 지금까지는 키르케고르가 신앙을 강조하기 때문에 그를 의지론자로 분류하는 흐름이었다. 그런데 저자는 이에 반대하여 키르케고르를 비(非)의지론자(non-volitionalist)라고 주장하였다. 물론 키르케고르의 사상에 인간의 자유의지나 선택과 결단을 강조하는 부분이 강한 것은 인정하지만 그보다도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의 이면에는 신의 섭리와 주권이 있기 때문에 키르케고르를 비(非)의지론자라고 주장한다. 이 부분 역시 필자의 기존 생각을 바꾸게 한 새로운 주장이었다.
기독교 신앙은 이성과 함께 역사성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때가 차매"(갈4:4) 영원자가 역사 속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무의미하고 목적 없이 흐르던 크로노스의 시간은 이제 결정적 시간인 카이로스가 되었다. 강영안 교수는 그의 ‘예수와 소크라테스’라는 주제 강연에서 기독교의 핵심은 역사성에 있으며 특히 키르케고르의 역사관은 '역사 최소주의'(historical minimalism)라고 설명한다. 역사 최소주의란 예수에 대한 모든 역사가 다 필요한 것은 아니라 예수의 탄생, 죽음, 부활이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역사성을 가질 때만 영원한 실존이 되는 것이다. 영원한 신과의 만남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역사성이 형성된다. 유한한 인간은 신앙을 통하여 영원한 실존이 되며 영원한 실존이 될 때 비로소 역사성이 형성되는 것이다. 종교와 철학이 말하는 역사는 동일한 것의 영원한 회귀이다. 여기서 새로움이란 전혀 없다. 사실상 일반 철학에서는 역사성의 근거나 순간의 의미를 찾을 수가 없다. 그러나 기독교에 있어서 역사는 중요하며 매순간이 새롭다. 왜냐하면 영원한 존재와 신앙의 관계 속에 있기 때문에 신자의 순간은 영원과 잇대어 살아가기 때문이다. 폴 틸리히는 이를 ‘영원한 지금’(Eternal Now)이라고 불렀고 한국의 주체적 사상가 다석 유영모는 우리말 ‘오늘’을 해석하면서 여기서 ‘오!’는 감탄사이며 ‘늘~(always)’은 부사로 주체적인 사람은 오늘을 영원같이 살아간다고 하였다. 영원하신 하나님과 믿음의 관계 속에서 시간은 의미 없이 흘러가는 크로노스의 시간이 아니라 영원한 의미를 가지는 카이로스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순간은 영원한 의미를 갖는다. “순간은 영원하다”고 말한 키르케고르의 '순간의 변증법'은 기독교 진리의 역사성을 강조한 것이다. 순간의 변증법이란 때가 차매 신이 성육신한 그 순간이며 이 절대적 역설 앞에서 인간이 회개함으로 신앙의 비약을 통하여 절대적이며 영원하게(absolutely and eternally) 절대역설인 성육신의 진리와 관계를 맺음으로써 유한한 존재가 영원한 존재로 바뀌는 순간이다. "모든 시대는 예수에 대하여 똑같은 거리에 있다"는 것은 예수와 역사적으로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나 2000년 후의 현대인들이나 모두 신앙을 통해서만 예수와 “동시대성”을 이룬다는 뜻이다.
6.
키르케고르의 《부스러기》와 토니 킴의 《키르케고르: 신앙의 합리성》에는 예수라는 단어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마치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한 번도 나오지 않고 신의 섭리를 강조하는 성경의 에스더서를 연상시킨다. 예수를 한 번도 언급하지 않은 배경은 이것이 철학 서적이기 때문이며 또한 예수가 너무나도 주술이나 마술처럼 값싸게 불려지는 것을 거부했던 키르케고르의 경건성 때문이리라. 《신앙의 합리성》을 읽을 때 1장 서론과 6장 결론을 먼저 읽으면 도움이 될 것이다.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3장 '절대적 역설'이며 그 다음으로 주목할 장은 5장 '신앙과 이성의 관계'이다. 2장과 4장에서는 소크라테스, 데카르트, 스피노자, 후설, 칸트와 헤겔과 같은 철학자들이 등장하여 다소 어렵게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간단한 안내를 하고자 한다.
기독교의 본질은 범신론이 아니며 아리스토텔레스적 자연주의도 아니며 초월이나 신을 하나의 가설이나 이론으로 여기는 종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기독교의 신은 하나의 가설이 아니라 인격이며 실재이다. 인류의 사상을 정리하자면 자연주의와 초자연주의, 동일철학과 차이철학, 이성주의와 신앙주의, 주지주의와 주의주의로 나눌 수 있다. 자연주의와 동일철학과 이성주의는 범신론으로 흐르며 여기서 언급하는 초월은 하나의 이론이며 가설로 설정한 것에 불과하다. 실제로 초월을 알 수는 없다고 하는 입장이다. 반면에 초자연주의와 차이철학과 신앙주의는 신과 인간, 자연과 초자연은 절대적 차이가 있으며 신은 실재이며 인격이며 인간의 역사를 주관하고 섭리하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인간은 초월하는 신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초월하는 신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신의 계시를 믿음을 통해서 가능하다. 진리에 도달하는 주도권은 인간이 아니라 신에게 있다고 주장한다.
키르케고르의 관점에서 볼 때 데카르트, 스피노자, 헤겔, 슐라이허마허는 자연주의에 불과하며 초월하고 영원한 존재인 신을 소개하는데 실패했다고 평가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앙보다 이성을 우선시하며 진리의 주체성보다는 객관성을 앞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계몽주의의 창시자 임마누엘 칸트와 현상학의 창시자 에드문트 후설은 비록 초월과 진리의 선험성을 언급하기는 하지만 그들도 초월을 하나의 가설로 설정할 뿐이지 실제 신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고 키르케고르/클리마쿠스는 비판한다. 키르케고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철학의 진실보다 철학자의 진실이며 기독교의 교리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실존을 드러내는 성도의 삶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기독교는 교리가 아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부스러기》의 목차 앞 면에 세 가지 질문이 나온다. "영원한 의식에 대한 역사적 출발점이 있을 수 있는가? 이러한 출발점이 어떻게 단순히 역사적이라고 하는 것 이상의 관심을 일으킬 수 있는가? 사람은 역사적 지식 위에 영원한 행복을 세울 수 있는가? / 요하네스 클리마쿠스 지음/ 쇠렌 키르케고르 간행/ 코펜하겐 1884년." 이 세 질문에 대한 답은 모두 "그렇다(Yes)"이다. 필자가 겪었던 시행착오와 혼란을 줄이기 위해서 전문가들에게 확인한 그 답을 미리 공개하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난 후에야 비로소 이 질문과 답이 키르케고르 사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임을 알게 될 것이다.
7.
근대 철학의 창시자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고 말하며 의심이 진리탐구의 열쇠라고 말하지만 키르케고르는 "나는 믿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하며 신앙이 진리탐구의 열쇠라고 반박한다. 키르케고르 사상에서 신앙과 이성은 어떤 관계인가? 인간의 이성은 절대역설인 신의 성육신을 부조리이며 모순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오히려 '이성이 부조리하다'(the reason is absurd)고 선언한다. 신의 계시가 인간의 이성에게 부조리하게 보이는 이유는 신이 부조리해서가 아니라 인간 이성이 비진리이며 진리와 싸우고 있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혁주의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저자는 키르케고르를 비합리주의자(irrationalist)로 보는데 반대한다. 키르케고르 학자 이승구 박사는 키르케고르/클리마쿠스가 이성을 부인한다는 것에 대하여 반박하면서 그의 소논문 「《철학적 단편》의 신학적 읽기 시도」(《부스러기》와 《철학적 단편》은 같은 책의 번역임)에서 불신자의 이성과 신자의 이성을 구분하며 이렇게 주장한다. "사람의 이성은 하나님과 그의 계시에 따라서 기능할 때에 제대로 기능하는 것이다. 자충족성(self-sufficiency)을 주장하는 이성은 죄되고 교만한 이성이고, 바르지 않은 이성의 작용이며, 실족한 이성인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이성을 새롭게 자리매김하였으며 이성주의 철학자들이 닫아 놓은 초월의 세계를 열어 두었으며 정열과 결단과 의지와 실천이 빠져 버린 물탄 기독교 세계에 신의 은총에 대한 신앙의 정열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도를 일깨워주고자 했다.
끝으로 사닥다리의 이미지를 정리하면서 글을 맺으려고 한다. 요하네스 클리마쿠스는 소크라테스의 상기설(recollection theory)이나 헤겔의 절대이성(Absolute Reason)이 진리에 도달하는 길이라고 말하지 않고 기독교의 진리관이 영원한 행복에 도달하는 사닥다리라고 제시하고 있다. 신약성경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요1:51)고 기록되었는데 사닥다리는 구원의 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하강)과 부활 승천(상승)을 상징하며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행복에 이르는 길임을 암시하고 있다. 사닥다리는 두 기둥으로 이루어졌다. 한 기둥은 신앙이다. 신의 성육신이라는 역사적 계시를 믿는 믿음을 말한다. 또 다른 기둥은 중생한 이성이다. 중생한 이성은 그 교만을 버리고 신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하는 협력자가 된다. 사닥다리의 가로대는 구원받은 신자들의 행함과 실천을 통한 성화의 과정을 말한다. 하늘을 오르락내리락 하는 이미지는 절대적 역설인 성육신의 계시를 믿음으로써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앙은 단순한 지식에서 그치지 않는다. 신앙이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주체적 정열이다. 바른 신앙은 바른 행위와 열매로 나타난다.
2012년 2월 미국에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그는 토니 킴이라고 자기를 소개했고 고든-콘웰 신학교를 나온 개신교 목사이며 벨기에 루벵 대학과 네덜란드 자유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미국에 대학원 대학을 설립한 키르케고르 학자였다. 그가 어떻게 파주에 조용히 있는 나에게 연락을 했는지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잠시 내가 연구원으로 있었던 미네소타 세인트올라프 대학교 키르케고르 연구소에 문의하여 자신의 키르케고르 연구서를 번역할 만한 한국 학자를 소개해 달라고 의뢰했는데 세 사람을 소개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두 분은 연로하시거나 학교일로 바쁘셔서 번역을 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나에게 번역 의뢰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마침 그때 나는 키르케고르와 다석 유영모의 실존사상을 주제로 박사논문을 쓴 후에 키르케고르 사상을 사람들에게 소개해야 한다는 막연한 부담이자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번역을 맡아서 몰입하게 되었다. 그런데 원서에 어렵고 난해한 부분이 있었고 저자의 의도를 미처 파악하지 못한 부분도 있었기에 난감한 점이 없지 않았다. 분명코 키르케고르는 “신앙은 부조리하며 역설”이라고 했는데 어찌하여 저자는 ‘신앙의 합리성’을 주장하는 것인가? 저자가 직접 설명을 하는데도 저자의 주장을 납득하는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개혁신학의 관점에서 키르케고르를 어떻게 해석하는지를 배울 수 있는 귀중한 기회였다. 감사하게도 이 책의 가치를 알아봐 준 홍성사를 만나기까지 6년은 헛되지 않았다. 그동안 이 번역 초안을 품고서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소크라테스, 칸트, 스피노자, 데카르트, 에드문트 후설 그리고 헤겔 사상을 공부하는 시간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이 책에서 인용된 책들을 직접 찾아서 전후 맥락을 읽고서 번역을 할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이었다. 가장 행복했던 것은 저자와 수시로 이메일로 200번 이상의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으면서 저자의 의도를 알아가는 배움의 즐거움을 누린 것이다. 저자와 충분히 소통하고 확인하는 과정이 없었더라면 이 책을 출판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토니 킴 박사와 한국 키에르케고어 학회 고(故) 표재명 박사님, 이승구 박사님, 이상훈 박사님을 비롯한 여러 선생님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이 책이 빛을 보도록 출판을 허락해 주신 홍성사의 정애주 사장님, 편집자 김진원 선생님, 디자이너 김진성 과장님 그리고 책의 내용과 출판에 대하여 충분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권순영 선생님 그리고 내 영혼의 동반자이자 사랑하는 아내 마은희 사모에게 감사하며 함께 해주시고 기도해 주신 삼성교회 교우들에게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