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서 강해 (송태근, 노진준, 김회권) -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
다니엘서 강해, -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현재를 살아가는 성도의 믿음 -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은 설교자인 나로서 꼭 등반해야할 성경의 최고봉우리들이다. 다니엘서를 통과하지 않고는, 내용의 3분의 2가 구약를 담고 있는 요한계시록의 묘미를 즐기고 그 의미를 깨닫기는 쉽지 않으리라.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을 볼 때, 고난가운데 믿음을 지키는 문제, 하나님의 계시, 성도의 최후 승리에 대한 모티브가 일맥상통한다. 다만, 다니엘서의 계시는 다니엘도 이해할 수 없는 먼 훗 날에 성취될 예언이므로 그 예언의 책을 봉함하라고(단12:9) 다니엘에게 지시하는 한편, 요한계시록에는 이미 '정한 기한'이 다 차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심판이 집행되는 시기이므로, 어린 양이자 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인봉을 열어야 할 때임을 강조하는 것이(계5:5) 다니엘과 요한계시록의 차이이다.
왜 다니엘서를 읽어야 하는가?
첫째,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이 소망가운데 믿음을 지키는데 위로와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비록 세상 권세가 아무리 강한 것처럼 보이지만, 영원한 권세와 능력은 오로지 하나님께만 있다. 다니엘서는 당시의 세상 권세를 다 가졌던 앗수르와 바벨론과 페르시아와 알렉산더의 헬라와 로마제국의 흥망성쇠를 다 보여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나라만이 영원하다는 진리를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성도들은 눈에 보이는 지상 나라에 집착하지 말고, 날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면서,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이것이 다니엘이 보여주는 진정한 영성이다. 적용해보자면, 우리의 신앙생활도 우리 교회의 숫자가 많아지고 교회 건물이 커지는 보이는 현상에 집착하거나 안주해서는 안되고, 삶의 모든 영역인 경제 정치 문화 교육 사회면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답게 살고 그것을 추구해가는 일에 헌신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풀무불의 연단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이 땅의 고난을 두려워하기보다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건의식을 가져야한다. 심지어 사자굴에 들어가는 신앙의 용기와 진리의 길을 걸어가는 신앙인의 자부심과 희열을 가져야만 한다.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피하고 현실을 도피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고난을 초극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부활에 참예하고자 하는 자들로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자들이다. 고난과 역경가운데 있는 교회와 성도에게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은 최고의 선물이다. 아니, 고난과 역경을 통해서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고 환상을 보게 될 것이라고 필자는 확신한다.
둘째,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은 이단들의 온상이 되었다. 교회는 다시금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을 되찾아오는 영적 전쟁을 치루어야만 한다. 다니엘서의 2300주야의 문제와 안식교, 요한계시록의 144,000명과 이단들의 잘못된 종말론 등,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은 이단들이 달려들어서 독차지하려는 성경의 보물이다. 참다운 교회는 다시금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을 되찾아 와야하며, 왜곡되 있어 읽기를 두려워하는 성경의 보물을 다시금 사랑하고 애독하고 묵상하고 삶에 적용해야만 한다. 다시 반복하지만 다니엘서를 읽는 이유는 요한계시록의 묵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중요하다.
셋째, 다니엘서를 이해하는 것은 예수님 당시의 신약시대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를 제공한다. 구약과 신약은 400년간의 침묵시대의 간극이 있다. 다니엘서에는 예수님 당시의 신약시대의 배경이 되는 수전절(요10:22)의 유래(주전 164년)가 담겨져 있고, 알렉산더 대왕의 헬라시대, 셀루쿠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의 예루살렘 성전 모독사건(주전 167년) 등의 배경을 다루고 있다. 이는 유대의 독립운동을 했던 마카비 장군 시대에 있을 혹독한 고난을 예고하고 이 고난을 이길 수 있도록 다니엘의 예언을 통하여 위로하고 있는 것이다. 다니엘서는 첫째는 마카비시대에 세루쿠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 때의 박해를 극복하는 것을 위로하고 돕기 위한 책이고, 둘째는 예수님 시대의 로마제국의 폼페이우스나 티투스 장군에 의한 예루살렘 성전 모독과 파괴사건을 극복하기 위한 위로의 책이며, 셋째는 종말로 적그리스도의 활동으로 인하여 고난당할 교회에 주어진 위로의 책이다.
다니엘서의 의미
첫째, 하나님의 나라만이 영원하다. 성경학자 워런 위어스비는 성경 1,189장 가운데 다니엘서 2장을 감히 '가장 위대한 장'(the greatest chapter)라고 손꼽아 강조하고 있다. 왜 그런가? 하나님께서 역사의 통치자요 주관자이심을 밝히 보여주며, 세상 나라는 멸망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영원하다는 역사의 큰 그림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다니엘서 2장 44-45절은 요한계시록 11장 15절과 더불어 감히 성경 전체의 요절이라고 하겠다. 단2:44, 이 여러 왕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망시키고 영원히 설 것이라 계15:11,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둘째, 구약성경 최초로 내세사상과 믿음을 지키고 순교한 성도들의 개인의 부활을 다루고 있다(단12장). 적그리스도, 즉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를 대적하고 방해하는 세력은 막강해보인다. 자기 마음대로 권세를 휘두르며, 음모와 술수와 거짓과 뇌물로 심지어 믿음의 사람들까지 매수하여 교회를 공격한다(단8장과 11장에 세상 권세자들이 택한 백성의 공동체를 와해하는 것을 보라). 저들은 거룩한 곳을 모독하며 더럽힌다.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배반하는 자들에게 보상을 준다. 마치 한국전쟁 당시 마을에서 무시당한 사람들에게 완장을 차게 해서 악행을 저지르게 했듯이, 믿음의 공동체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성도를 매수하고 믿음을 배반한 자들을 지위와 물질과 명예로 높이는 분열 정책을 쓸 것이다. 하지만 성도는 더욱 용맹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며 가르치며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영웅적인 순교가 아닌 일상의 순교를 실천해야만 한다. 일상의 비영웅적인 순교는 바로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하는 시간이다. 세상의 가치관에 훱싸여 떠내려가는 삶이 아니라, 말씀을 묵상하고 다니엘처럼 뜻을 정하여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성도들에게는 '순교적인 정신'이 있어야 가능하다. 세상의 가치관, 옛 사람의 욕망을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살아가는 말씀과 기도생활인 것이다. 다니엘서 10장에 기록된 '다니엘의 세 이레 기도'(단10:2)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다 주관하시므로 방관해도 좋다는 태도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다 주관하신다. 그러니 나는 할 일이 없다'는 식으로 믿음을 빙자하여 기도하기를 게을리하는 것은 중세의 이단인 이신론(Deism,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였으나 자연법칙에 남겨두고 하나님은 떠나가셨다는 이단 사상)과도 같은 것이다. 다니엘서에서 말하는 기도는 그 공간과 시간의 지평을 전 세계 역사와 영원으로 확장한 것이다. 결코 자기 중심적인 기복주의적 기도가 아니다. 그리고 기도가 소용없다는 식의 비관주의는 더더욱 아니다. 주기도문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것처럼 날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며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동참하는 것이 마땅한 성도의 삶이다.
셋째, 고난은 잠시이며 정한 기한이 있으므로, 인내로서 고난을 통과한 성도들은, 비록 고난을 당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가르치고 나누며,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더욱 연단되고 희게되고 정결하게 될 것이다(단11:32, 35). 여기서 고난은 잠시임을 깨달아 영원한 소망과 축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니 능히 극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보여준다. 고난은 성도들로 하여금 지상세계와 결별하게 하는 하나님의 감추어진 축복의 통로이며, 고난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은 더욱 정금같이 나오게 된다. 고난과 하나님의 섭리가 다니엘서에 담겨 있으며, 하나님과 성도들의 최후의 승리를 역설하고 있다. 풀무불 사건을 보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신앙을 가진 교회의 승리를 말한다. 사자굴 사건을 보라. 섭리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역설한다.
송태근의 <다니엘서>는 다니엘서의 전반적인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소개해주고 있다. 너무 복잡하게 다니엘서를 접근하여 독자로 하여금 겁에 질리게 하지 않도록 배려한 다니엘서의 기본서라고 하겠다.
노진준의 <다니엘서>는 다니엘서의 학문적인 접근보다도 오늘날을 사는 성도들의 고난과 역경을 이해하면서, 성도들의 삶의 정황을 고려하여 설교한 설교집이라 가치가 있다. 다니엘서를 가지고 씨름했을 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삶의 애환을 가지고 함께 아파하고 눈물흘린 흔적이 곳곳에 나타난다. 그는 미국의 이민자이며, 이민 목회자이며, 소아마비를 앓은 장애를 가졌다. 그러나 그의 정신은 사랑이 묻어나고 유머가 있으며, 정열적이며 교회와 성도를 사랑하는 지도자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김회권의 <하나님 나라 신학으로 읽는 다니엘서>는 학문적이다. 다니엘서의 내용이 무엇인지 잘 나타난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 다니엘서를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해야하는지 씨름한 흔적이 나타난다. 다니엘서의 학문적인 논쟁점은 무엇인지를 알려주면서도, 독자가 길을 잃지 않도록 다니엘서의 메시지가 무엇인지, 다니엘서에 흐르는 복음의 정신이 무엇이며, 성도가 어떻게 고난을 이겨야 하는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복음을 잘 접목하고 있다.